하나님의 선물(이귀재 권사)
2018-03-29 15:46:12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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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절 말씀)


 


 


   집안에 불상을 모셔둘 정도의 불심이 강한 집안에서 자란 남편이 언더우드 선교사께서 설립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나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그 해 겨울, 거리를 환히 비추던 네온 불빛과 요란하게 울리던 징글벨 소리를 뒤로한 채 남편을 따라 낯선 타지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20살에 고향을 떠나 일터가 있는 서울을 벗어나보지 못했던 나에게 그 곳은 처음으로 밟아보는 새 땅이었다. 정들이며 살던 것들을 떠난다는 불안함과 두려움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새로운 땅에서 만나는 이웃들과는 소통이 어려웠다. 사투리를 알아들을 때쯤 큰 아이가 태어났다. 모시고 살던 시어머님은 막내 시동생의 제대와 복학으로 상경하셨고, 시누이마저 결혼으로 가버린 집안은 빈 집같이 썰렁했다.


 


 


  


    어느 봄 주일 아침, 느닷없이 남편이 교회를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친구같이 지내던 시누이가 떠나버려 심심하기도 하고 고향에 계신 친정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가시며 술을 끊으셨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은지라 못 이기는 척 남편을 따라 나섰다. 이 도시에서 제일 큰 교회라며 남편이 안내한 곳은 도심에 있는 교회당이었다. 남편을 따라서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서있던 이들이 낯선 우리를 반기며 따라와 남편에게 몇 마디를 묻고는 우리를 안내했다. 예배시간이 임박했는지 좌석은 이미 만석이라 맨 뒷자리에 우리를 앉혔다. 그리고는 등에 업힌 아이를 빼앗다시피 데리고 나가버렸다. 자다가 깬 아이가 낯선 이들에게 안겨가며 까무러치게 울어대고 아이를 빼앗긴 나도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이 불안하고 불편했다. 옆 자리의 남편에게 아무리 눈짓을 해도 모른 체 했다.


     


 


 


   마이크를 통해 왕왕 울려대는 목사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고, TV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유행가 가락이나 흥얼대던 내 귀에 찬송 소리는 생경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어 이 많은 사람들 속에 나만 혼자 이방인인듯 외롭고 답답했다. 지루한 예배가 끝나 아이를 돌려받자 나는 도망치듯 예배당을 나왔다. 그 후로도 그것은 쉽게 적응되지 않아 주일이 돌아오는 게 불편했다. 몇 번이나 그 예배당에 출석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주일만 되면 공연히 남편에게 시비를 걸거나 트집을 잡아 교회가는 걸 모면하곤 했다. 후일 안내부장으로 봉사를 하며 그 때의 느낌을 종종 되새겨 보곤 했었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마음이 편해할까, 내 말 한 마디나 내 표정이 혹시 그들에게 불편하고 서먹하게 하지는 않는가 하면서... 과잉 친절은 보기에도 불편하지만 받는 이들도 불편하다.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또 너무 무심하지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는 작은 딸 아이가 태어나면서 도시 외곽에 조성된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벽돌로 아담하게 지어진 교회가 있었다. 교회, 이사를 끝내고 남편이 제일 머저 한 일은 가족들을 앞세위 교회에 등록을 한 일이었다. 다행히 내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회였다. 주눅들고 기 죽어 숨도 크게 못 쉬던 큰 교회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했다. 공단과 인접해 있으니 교우들 중에는 또래의 젊은 부부들도 많았다. 아이들은 교회 부설 유치원이나 주일학교에서 저희들만의 세계를 배워 나가고나는 아이들을 통해 또래의 교우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내 신앙 생활을 풍성하게 이끌어 줄 귀인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하면서도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산아제한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둘만 낳으라'는 표어가 나붙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하나만 낳으라고 연일 메스컴은 떠들어댔다. 아이 셋을 데리고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며 씁쓸해하던 이웃의 말이 아니어도 메스컴의 위력은 대단해서 아이 넷을 데리고 거리에 나서면 미개인 취급도 서슴치 않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출산율이 1.21명으로 세계 최저 수위라며 걱정하는 요즘의 세태와는 많은 차이가 있던 그 때에, 그녀는 네 아이의 엄마였다.


 


 


   


   교회를 출석한지 일 년쯤 되었을까? 목사님께서 병원 심방에 동행해줄 수 있냐는 전화를 해오셨다. 심방대원과 연락이 닿지 않아 나를 부르셨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직 세례도 못 받은 나에게 심방 동행 요청이라니...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거절하기는 더 어려워서 아이들을 이웃에 맡기고 순순히 목사님을 따라 나섰다. 맹장수술로 입원했다는 교우는 남자였다. 환자복을 입은 그를 마주보고 서 있기가 민망해 목사님 뒤에 비켜 서서 목사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서있는데, 누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 깡 마른 체격에 짧은 커트머리를 한 그녀였다. 한쪽 팔의 셔츠 절반을 접어 조금 남아있는 팔뚝 위로 질끈 동여매고 나를 보며 웃고 서 있는 그녀를 보며 '~'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제서야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목구비가 번듯한 호남형 미남이었다. 아이들과 놀이터를 배회할 때나 상가를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인사를 하거나 말을 나눠본 적은 없었다. 우리는 같은 교회에서 예배만 드렸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며칠 후 놀이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와 좀 가까워진듯해 그간의 안위부터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속 깊은 얘기도 들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우리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을 만나는 때가 종종 있다. 양상은 좀 다르지만 나도 그랬고 그들 부부도 그랬다. 시련이 찾아온 것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와 트럭 간의 교통사고로 그녀는 한쪽 팔을 잃었고 그녀의 남편도 부상을 입었다고... 그 모든 아픔과 시련을 이겨내고 네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된 그들이 내게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로 보였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고백은 따로 있었으니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살림과 육아하기가 힘들지요?'라는 내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내가 애들이라도 많이 낳아야 남편을 내 곁에 오래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아서...'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어느 노교수님의 말씀대로 나도 나이 드는 게 싫지 않다. 젊었을 때로 다시 돌아가라면 단연코 사양하겠다. 나이 들면서 얼굴이 두꺼워 뻔뻔해진 것도 좋고 웬만해선 주눅들지 않는 것도, 아니 주눅 들지 않으려 애쓰지만 젊었을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주일예배 외에는 어떤 모임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는 그야말로 핑계였고 그보다는 친화력도 자존감도 낮아 어떤 모임에도 쉬이 섞이지 못하고 겉돌게 되었다. 그런 나를 세세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셨던 것을 아닐까? 나를 알아주고 불러주고, 때로는 언니같이 이끌며 다독이던 그녀가 있어서 나는 참 고맙고 좋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 못해 들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구역예배 참석은 물론이고 교회 청소나 때로는 강단 꽃꽂이까지 언제나 그녀와 함께였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내가 죄인인 줄도 몰랐고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었다. 그런 나의 무지와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세례를 받던 날도 그녀는 나와 함께 울어주었다. 이제 그 눈물의 감격은 말라버린지 오래지만 그 날의 그 감격만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또 같은 구역을 섬기며 함께 울고 웃던 한민정 집사와 김주의 집사와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며 형제같은 사이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밝고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또 나를 이끌던 그녀는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름다운 인연으로 남아있다.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으로 살던 그녀를 볼 때면, 진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지는 담대함과 여유가 있어 보여서 절로 머리가 숙여지곤 했었다. 어느 곳에 계시더라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마음 속으로 빌어본다.


 


 


     


   얼마 전 손가락 하나를 베었다. 약을 바르고 싸매어도 쿡쿡 쑤셔대며 온 신경을 자극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견디기 힘들게 아파서 아예 한 손으로만 모든 일을 해결했었다. 종일토록 구정물 통에 손을 담그고 살아야 하는 주부의 일상에서 그것은 여간 불편하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손가락을 치료하며 오래 전 그녀를 다시 떠올렸다. 장애는 조금 불편할 뿐이라며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다독이던 그녀의 밝은 표정 뒤에 숨겨뒀을 눈물과 아픔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위로하기에는 서른 해를 겨우 살아낸 나의 믿음과 인격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미숙했었다. 그 뒤로 수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내 지나온 삶이 고난과 역경의 세월이었다고 나 스스로 자위해 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아픔과 눈물을 진심을 다해 위로해주는 일 만큼은 아직도 생각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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