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나무가 사라지고...(이귀재 권사)
2018-04-26 11:41:26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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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가 사라지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편 1절)


 


 


 



   70년대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며 정밀기능사 양성에도 힘썼다. ㅂ시를 비롯해서 ㄱ시와 ㅇ시에 국립기계공업학교를 세우고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정밀 기능공들을 양성했었다. 해군 사관 학교장을 거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하신 남편의 매형께서도 ㅈ기계공업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내 남편과 시누이를 앞세워 이 낯선 도시로 내려오게 되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우리 역사에 가장 무자비하고 불행한 유혈 사태가 발생하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공포였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환멸이기도 했다. 그 모든 시대적 상황을 거부라도 하듯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미련없이 그 도시를 떠나버렸다.


 


 



   누구를 따르느냐에 의해 우리의 인생이 바뀐다던가 8년 전 크리스마스, 휘황찬란했던 서울 거리를 뒤로 하고 그 한 사람을 따라 이 낯선 도시로 내려왔다. 큰 나무에 기대어 아이를 낳아 기르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그의 부재는 우리의 삶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남편은 정들었던 일터를 ㅈ시로 옮겼고, 남편의 삶에 얹혀져있는 우리 역시 그 도시를 떠나야했다.


 


 


   내 것 네 것 없이 서로 나누고 보듬던 이웃과 교우들, ㅇ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며 세상에 없는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던 나와 아이들에게 그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었다. ㅇ교회 목사님도 서운하셨던지 우리를 친히 ㅈ시에 있는 ㄷ교회까지 안내를 해주셨다. 총신 동기시라는 ㄷ교회 권 목사님은 큰 키에 그 지방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셨다. 큰 길가에서 50여개의 나무 계단을 올라가 외롭게 서있던 3교회, 예배 시간이 임박하면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70~80명의 성도들은 여느 대가족 모임 같이 따뜻했고, 목사님과 성도들 모두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쾌활하고 유머러스했던 ㅇ교회의 유 목사님과 달리 권 목사님은 인정 많고 자상하신 반면 매우 엄격했던 분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심방을 오셔도 집안으로 발을 들이시는 법이 없으셨고, 현관문을 열어두신 채 현관 앞마루에 앉아 기도를 해주시고 물 한잔 청해 드시고는 돌아가셨다. 시간이 가면서 남편도 아이들도 ㄷ교회의 성도들과 교류하며 표면상으로는 ㅈ시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가는 듯해 보였다.


 


 


   우리는 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분양했다. 대출이 많아 나도 일을 해야 했지만 교통이 편리해서 좋았다. 그러나 집 앞의 8차선 도로를 건너 학교로 가는 아이들의 통학길이 안심되지 않아 늘 불안했다. 행동이 느리고 유유자적하는 큰 애와 천방지축 나대는 작은 아이 때문에 집을 나서서 들어오는 시간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불안해하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어느 날부터 남편이 출근길에 아이들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선선히 나섰다. 새삼 남편의 자상함에 고마움만 느꼈지 그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 시간은 흘러갔다.


 


 



   1986년 오월 보름은 시어머님의 생신이었다. 평일이라서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시댁으로 올라왔다. 맛있는 음식상과 즐겁게 웃고 떠드는 가족들 사이에 우리 식구만 빠진 게 서운했지만, 곧 집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전화를 돌렸다.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전화를 받은 여직원의 말투가 전과는 다르게 어딘가 수상쩍었다. 남편이 없다며 전화를 끊으려는 여직원을 큰 소리로 불러 재차 물었다. 그 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대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남편은 이미 두 달 전에 사직서를 냈고 바로 오늘 수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두 달이라니? 매일 아침 도시락 가방과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는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해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닐 거라고, 꿈 일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할 새도 없이 남편과 마주 앉았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리어카라도 끌어서 먹여 살릴테니 걱정 말라며 소리부터 내지르는 남편을 바라보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실망과 좌절을 느껴야 했다. 배신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 달을 지내면서 한 마디, 단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사표를 냈어야만 했는지 또 이 낯선 타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으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간 우리를 속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린 두 딸을 내버려둔 채 자신의 핏줄 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어두운 터널 속을 해매는 것 같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이런 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내 형편을 눈치채신 목사님께서 이따금 들러 기도를 해주시는 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날도 지나가다 들르셨다며 목사님이 오셨다. 언제나 처럼 현관문을 열어 놓으신 채 마루 끝에 앉아 내 형편을 찬찬히 살피시고는 시편 23편을 가만 가만 읽어주시고 돌아가셨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목사님이 읽어주시던 시편 23편을 다시 음미해 읽었다. 비록 지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온다는 소망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내 인생을 흔들던 위기의 순간에도 나를 지켜준 고마운 말씀이기도 했었다.


 


 


   늘 머리맡에 성경책을 두었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불안과 공포를 조금씩 가라 앉혀갔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베드로전서 5장 7절) 성경 말씀을 통해 소망과 위로를, 아이들을 바라보며 힘을 냈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남편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남편에게도 이 모든 상황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란 걸, 부족한대로 서로 의지하며 험한 세상 함께 하라고 나와 짝된 사람일 뿐, 결코 그는 내 믿음의 대상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하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내 동생들의 어려움을 살펴주고 배려했던 고마운 일만 기억하자고 마음으로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계속되는 시련은 그 모든 다짐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고, 또 다시 원망과 미움의 화살을 끝없이 쏘아대는 나를 발견해야 했었다.


 


 


   지난 해 추석은 여행하기에 좋을 만큼 긴 연휴였다. 모처럼 두 딸을 대동하고 오래 전 떠나온 ㅈ시로 여행을 떠났다. 늘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있던 ㄷ교회와 권 목사님을 뵙고 싶은 열망이 여행의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이제 80대 중반쯤 되셨을 터이니 건강이 괜찮으시다면 생존해 계시리라는 소망으로 여행길이 설레었다. 몇 년 전, ㅇ교회 유 목사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뵈러 갔더니 나를 알아보시고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했었는데 얼마 후 소천하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었다.


 


 


   먼저 ㅈ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래 전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를 찾았다. 그러나 30여년을 온갖 풍상에 시달린 아파트는 그 수명을 다했는지 헐어지고 새로운 아파트로 재탄생되는 중이었다. 허망하고 섭섭했다. 발길을 돌려 애초에 우리가 목적했던 ㄷ교회를 찾아 나섰다. 살던 곳에서 30분 정도를 걸으면 언덕 위에 홀로 외롭게 서있던 교회, 그 모습이 궁금했다. 아직도 그대로일지, 바뀌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목사님은 생존해 계신지, 많은 생각으로 뛰다시피 걷는 나의 발길을 붙잡은 건 딸들 뿐만이 아니었다.


 


 


   강산이 서너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찾지 않았던, 아니 찾고 싶지 않았던 그 곳은 나의 발길을 막기라도 하겠다는 듯 전혀 새로운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여기가 거기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변해버린 그 곳을 우리는 모든 기억을 더듬어 2시간 넘게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가 반대편 언덕 위에서 ㄷ교회 성도라는 아주머니를 만나 교회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어 부리나케 뛰어 내려와 ㄷ교회를 찾아냈다. 쭉쭉 올라가 있는 고층아파트 사이에 깎고 뭉개져 둔덕이 되어버린 곳에 ㄷ교회라는 이름표를 그대로 붙인 교회당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이름만 보고도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 문을 당겨보았다. 혹시 들어가 볼 곳이 있을까 하고 교회를 한참 살피다가 오늘이 휴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살던 집이 사라진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허전하고 서운했다. 교회 계단에 주저앉아 옛날을 회상했다. 수없이 오르내리던 이 언덕,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에 내동댕이쳐진 어린 짐승새끼들 마냥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며 어딘가 기대고 싶지만 기댈 곳 없어 서러웠고, 보호받고 싶지만 보호해 줄 이가 없어 수없이 찾고 불렀던 이름은 '하나님, 예수님'이었다. 우리는 그 옛날의 서러움에 한참이나 계단에 앉아 훌쩍이다 일어나 쪽지를 썼다. 문 틈으로 끼워 넣고 누군가의 연락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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